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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 삼주차




나는 지극히 취미적인 이유에서 악기를 다루는데, 말인즉슨 전혀 잘 하지도 못하고 사실 내가 하는 악기계에 대한 지식도 별로 없는 주제에 그냥 악기 소리가 좋아서 그 악기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를 12년쯤 하면 아예 못하는 건 아닌 어정쩡한 경지에 다다르므로 최근에 제의를 받아서 오케에 들어가게 됐다. 그것도 교회 오케에.


자발적/비자발적 무신론자로써 내 입장을 밝히자면 나는 신자가 아니며 앞으로도 신자가 될 생각이 없지만, 굳이 여길 받아들인 이유가 뭐냐면 한 5년 전인가 여기서 음악쪽으로 다른 거 하다가 이것저것 겹쳐서 관둔 적이 있었는데 붙어있는 시간 대비 이 사람들이 나한테 제일 전도를 안 했다. 2년 동안 전도 권유 두 번 받아봤는데 내가 거절하니까 한 마디도 더 안 꺼내더라. 나는 개신교 특유의 거절시 지랄발광하는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던지라 이런 반응에 매우 감명을 먹었고, 여기서 하는 활동 중 종교적인 냄새가 덜 들어가는 건 나도 별 부담 없이 참석하게 됐다.


여튼 한 5년만인가 다시 돌아간 건데, 나한테 이걸 권유한 양반이 이제 드디어 전도의 마음을 드러내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5년 전에는 금요일 저녁이 내 주파트였고, 연습은 안식일, 그러니까 토요일 오후였는데 연습에야 종교 냄새가 날 일이 별로 없었고, 금요일 저녁은 오케 자리가 사이드라 여는 찬송 몇 개 켜고 중간에 예배당 자리로 갔다가 설교 끝나면 닫는 찬송 몇 개 켜고 집에 가면 그만이었다. 나는 신도만 아닐 뿐 컬트적 철학서나 옛날이야기적인 면의 성경은 꽤 기꺼워하는 편이었으므로 그때도 예의상 딴 짓은 안 하고 심심하면 성경이나 읽다가 예배 끝나면 집에 갔다. 그러나 안식일 본예배는 교회 몸통 같은 거라...성가대까지 들어가는 큰 규모의 음악이 동원되는데 이것 때문에 오케스트라가 단상 위에 있게 된다. 말인즉슨 설교때 어디로 도망을 못 간다.


내가 흑심이라고 한 게 왜 그러냐면ㅋㅋㅋ 얘들은 본 얘배 전에 3~40분 안식일 학교라는 친목 코너 비스무리한 걸 가지고(그래봤자 인간이 많아서 친목은 안 된다. 그냥 본 예배보다 덜 엄숙하게 엔터테인먼트 코너가 있는 정도?) 30분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맞추는 연습시간을 가진 뒤 (다른 사람들은 알아서 자기 일 하러 간다. 점심 준비나, 청소년부 활동 뭐 그런 거) 본예배가 시작한다. 즉 비신자 오케 단원은 안식일학교가 끝나고 들어가도 별 문제가 없는 거지. 그런데 이 양반이ㅋㅋㅋㅋㅋㅋ나한테ㅋㅋㅋㅋ안식일학교 시작 시간을 가르쳐줌ㅋㅋㅋㅋ 나는 두 주 나가고 에라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하고 아예 늦게 나갔다. (종파 특유의 무심함 덕에 내가 왔는지 안 왔는지도 신경은 안 쓰더라ㅋㅋㅋㅋ)


본예배가 카메라 설치하고 뭐 그러는거라 딴짓 못하나 하고 쫄았는데 그 정도는 아니더라고. 내 앞에 앉은 언니 잘 자더라. 그래서 나도 성경급 전공서적 같은 거 가져가서 읽으면서 예배를 버티고 있다. 물론 불교철학서 같은 거 읽을 때는 나도 찔렸지만(...) 니네도 예배 듣기 지루하면 플라톤같은 거 가져가서 읽어라. 난 걔가 그때만큼 꿀잼이었던 적이 없음ㅋㅋㅋㅋㅋㅋ


사실 안식일 본예배의 가장 큰 단점은 중간퇴장 불가보다는 이 교회가 처한 특수적 상황 때문에 영어동시통역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말인즉슨 시간도 두 배, 노잼도 두 배...아니 노잼이 문제가 아니라, 무슨 명연설도 한 문장 읽고 다음 문장 외국어로 번역하면 텐션 떨어지고 노잼된다고...난 신자가 아니니까 앞으로 금요일에 나갈 일은 없겠지만 솔직히 설교 수준은 금요일이 더 재미있었다. 가끔 안 상식적인 얘기가 나와서 그렇지.


이런 거 빼면 오케 활동 자체는 꽤 재밌음. 나는 종류 안 가리는 떼창 성애자이므로 성가대 합창과 어르신들의 성경 떼창 모두 즐겁게 반주를 깔아드릴 수 있다ㅋㅋㅋㅋ 그리고 악기 잘 못하는 사람으로서 교회 음악의 장점은 무난한 박자와 무난한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는 점임. 하이포지션이나 비바체 빠르기 같은 건 없음. 틀려도 눈치껏 끼어들 수 있다ㅇㅇ 그럭저럭 하지만 잘은 못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장점이라고나 할까. 순전히 성가대만 노래하는 특창이 좀 문젠데 그건 서너번 연습해주니까 사실 큰 문제까지는 아니거든.



야 참고로 여기 목사가 여럿인데 그 중 한 사람이 생불이시다ㅋㅋㅋㅋ아니 생불이라면 목회자한테 실례니까 이 시대의 성인...? 여튼 내가 이 양반 전도 권유를 세 번 직접적으로 깠는데 아직도 나한테 상냥하심ㅋㅋㅋㅋㅋㅋㅋㅋ 뭐 마지막 두 번은 어쩔 수 없어서지만...성경 존잼이라 깔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변명이 아니라 진짜 이번 분기에는 너무 바빠서 그게 안 됨...솔직하게 말씀 넣기에 뇌 용량이 부족하다니까 허허 말씀이 중요한데...하면서 피곤해보인다고 비타민 한 통 챙겨주는 걸 보고 감명 받아서 종교에 투신할 뻔.(물론 투신하진 않았다...내 기준으로 얘네 교리중에 짜증나는 게 좀 있어서.)





근황


포스팅을 한참 쉬었는데 그건 전적으로 내가 지금 일적인 공부를 안 하는 잉여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임.

일이 바쁠 때는 글이 줄줄 잘만 올라오는데 왜 한가하고 잉여력이 넘치면 뭐가 안 나오냐...

여튼 거지같은 관념론자들을 버리고 프랑스로 갈아타니까 마음이 다 편함.

개취로 수사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게 니체나 푸코인데 확실히 푸코 정도면 쉽고 아름답게 글 쓰는 편이라니까.

작년에 감시와 처벌 읽으면서 광광대던 나 반성해라...

페미니즘 철학


 

 

맨날 sns나 뭐 그런걸로 페미니즘 접하니까 문턱이 낮아진 감이 없잖아 있는데 사실 페미니즘이랑 페미니즘 철학은 미묘하게 다름. 전자는 사회학에 가깝고 후자는 철학의 성격이 강해. 단어도 하나 더 붙었잖아, 철학. 갑자기 얼마나 이상한 물건인지 감이 오지 않냐? 자고로 비전공자에게 철학이라는 단어가 붙은 물건은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상책임.


왜냐하면 페미니즘 철학은 현대철학의 성격이나 정신분석, 존재론, 사회철학이 매우 복잡 미묘하게 엉킨 물건이라 배경지식 없이 손댔다가는 책에 쳐맞고 뒈져. 내가 아직까지 버틀러나 누스바움, 그로츠 읽고 페미니스트와 키배 뜨는 애들을 못 봤는데 그건 전적으로 난이도가 망해서임. 현대철학이 왜 지랄맞은지는 뭐 내가 이전 포스팅에서 충분히 설명해놨으니까....쨌든 이 책을 읽고 페미니스트와 배틀을 뜨고 싶다면 그건 좋은 일이지만 애초에 이런 책을 가지고 뜨는 배틀은 배틀이 아니라 학술토론임ㅋㅋㅋㅋㅋ 애초에 독서에 실패한 경우 그냥 그 책을 들고 흉기처럼 쓰는 게 차라리 공격력 상승에 도움이 돼. 이해 못한다고 까는 건 아니고 그냥 어려운 책이라 그럼. 순수이성비판을 완독 못했다고 멍청한 게 되냐? 그냥 칸트 이론에 대한 논의에 못 낄 뿐이지. (물론 가끔 나타나는 지적 능력이 인간 이하인 애들은 까는 거 맞음)


그리고 완독을 했으면 최소한의 인문적 소양이 있다는 얘긴데 그런 애들은 원초적 키배는 또 잘 안 떠. 왜냐면 자기 입에서 논리력이라고는 한줌도 없는 말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를 쪽팔려 할 인종들이라서. 그런 애들이 갑자기 인신공격 전략을 취하는건 그냥 상대가 말을 못 알아먹으니까 빡쳐서임. 아니면 자기가 질 거 같아서거나.

 


여하튼, 페미니즘 철학이 페미니즘과 언제 분화했다고 말하는 건 별 의미도 없고 애매한 소리임. 이쪽에서는 대모님 취급 받는 시몬 드 보부아르도 분류하는 데는 여러모로 애를 먹었으므로...그래도 대충 아주아주 일반적인 범주로 나눠보자면 페미니스트는 1, 2, 3 세대로 나눌 수 있어.


1세대는 권리 중심 운동가들이 주로 포진해 있음. 여성 참정권자들이나 뭐 그런 운동가들...내 기준에 여긴 사실 철학보다는 사회운동의 성격이 강한데, 일단 학술적으로만 보면 이 분야의 절대 1인자로는 보부아르가 있다. 핵심 저서인 2의성은 여성운동의 바이블 취급 받는 책이고, 지금도 사회적 논의의 반열에 들어가 있는 얘기들이 거의 대부분 등장함.

어거지로 쉽게 표현하면 남성이 선점한 주체의 세계에 여성들이 주체로 함께 올라서는 데 1세대의 목표가 있다고 볼 수 있어. 그래서 소외된 여성이나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분석하는 연구들이 많고, 대개 주체적 인간이나 이성적 인간을 이상향으로 둠. 1세대가 제일 많이 비판받았던 건 이전에 여성적, 즉 페미닌하다고 여겨졌던 특성을 부정하면서 동등하고 동일한 주체가 되고 싶어 했다는 거지.


2세대는 주로 성차 연구가들 중심이야. 여기서부터 철학의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1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성중립적 주체를 상정하고 거기로 올라가고자 했다면 2세대들은 성중립적 주체를 상정하지 않아. ..씨 쉽게 쓸랬는데 쉽지가 않네. 여튼 말도 안 되게 표현해 보자면 얘들은 남자와 여자와 그 외 성들 사이에 어떤 본질적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봤고, 이전의 연구들이 나는 성별 없는 보편적 인간을 상정해놨다고 주장은 하는데 그게 사실 좆 달린 애들 평균이었다고 말하는 게 핵심임. 그래서 이전 연구 비판하느라 각종 인간들이 소환되는데, 지일 많이 불려오는 게 프로이트, 푸코, 라캉, 들뢰즈, 메를로퐁티. 더보기로는 알튀세르나 콜버그, 롤스가 있는데 역시 역대급은 프로이트지. 아주 동네북이야. 솔직히 프로이트 모르면 페미니즘 철학은 안 들춰보는 게 정신건강에 좋음ㅋㅋㅋㅋㅋㅋㅋ (물론 프로이트도 아주 거지같은 글솜씨를 보유한 인간이지!)


그리고 덧붙이자면 저 본질적 차이는 막 육체 파워!! !! !! 뭐 이런 게 아님. 저번에 강간문화에 대한 글에서도 설명해 놨는데 세계를 받아들이는 문지방으로서의 몸은 애초에 복잡하게 교직되어있고 다른 몸과 교통이나 환원이 불가능해. 그런 의미에서 세계를 받아들이고 동시에 생성하는 그 몸과 그 방식 자체가 아예 다르다고. 뭔소린지 모르겠으면 그냥 흘려라...나도 이 이상 간명하게는 설명 못하니까. 여튼 쟤들이 얘기하는 남녀차이는 근력 이런 거 아니니까 그런 걸로 나한테 토 달지 마. 그걸로 물고 늘어지면 대답 안 할거임. 퉤퉤. 난 철잉여지 사회학도가 아니라고.


 

돌아와서, 3세대는 1,2세대가 하나든 둘이든 더 많이든 여튼 배타적 주체 개념 자체가 문제라고 보는 애들이야. 이 사이에서도 엄청 나뉘는데 굳이 보자면 세계적으로 글 어렵게 쓰기로 소문나신 주디스 버틀러가 여기 있으시다... 저분 학술지에서 최악의 저자상 수상함ㅋㅋㅋㅋ니들도 알아야 돼. 난해한 글 읽는 걸로 밥벌이하는 인문학자가 저 글 뒤지게 어렵다고 그러면 진짜 뒤지게 난해한거라고ㅋㅋㅋㅋㅋㅋ


뭐 어쨌든, 3세대들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를 뿜뿜하며 우리가 생각하는 육체적 차이조차도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이론을 펼침. n개의 성이나 퀴어링 뭐 다 이쪽에서 나온 거야. 이 세대에 속한 애들은 근본적으로 해체나 전도, 뒤집기, 탈맥락화 같은 걸 추구하고, 다원성을 지향함. 이전의 권력이 허구적인 것임을 밝히되, 그걸 거부나 부정이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재현하면서 밝혀내기를 원하는 거야. 여기도 푸코와 프로이트가 기본 베이스임. 특히 푸코. 푸코는 사실 비전공자도 읽을 만한 물건이니까 심심하면 사서 읽어봐. 꽤 양질의 독서가 가능함. (사실 어렵기야 어려운데 푸코 읽고 버틀러 보면 푸코가 달필로 보임. 나도 푸코 읽을 때 갖은 지랄 해놓고 나중에 이러는 거다ㅋ)

 


뭐 이건 개략적인 거여서 이 세대 간 구분 사이에도 어마 무시한 차이가 있고 자기들끼리 논쟁하고... 저 사람들 사이의 공통점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한다는 것밖에 없음. 하다못해 아주 기본적인 문제, 뭐 여자랑 남자랑 같냐 다르냐 이런 걸 물어봐도 다른 대답이 나올거고 같은 범주로 묶으면 심지어 짜증낼 수도 있음. 저 외로 뭐 레디컬 패미니스트들이라던가 TERF나 뭐 그런 방식으로도 나눠볼 수 있다고는 하는데 그건 학술적 분류가 아니니까 생략.


사실 페미니즘 철학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로 좁히는 게 애매할 정도로 현대 철학의 새로운 가지이고, 정의론이나 인간학쪽에도 무시할 수 없는 새로운 전환을 제시했어. 애초에 프레임 자체를 새로 짜자는 제안이었으니 학술적으로도 의의가 큰 셈이지.


나는 키배 자체는 참가 안 하는 편이고 팝콘 먹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기는 한데 전에 강간문화 글에서도 얘기했지만 논의가 좀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하는 열망은 있음. 미러링은 권력의 허구성을 재현하는 도구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거든. 탈맥락화 자체가 그런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으나 그건 글을 새로 팔 만한 주제니까 생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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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이 글 자체는 일하다가 힘들고 빡쳐서 쓴 글이 맞다. 사람들이 너 그러나 헤겔 박사한다고 나댈 거라는대 사라져...난 독일 놈들이 싫어....특히 철학하는 놈들....




노잼이 되긴 싫었는데...

요새 쓴 글들 다 노잼이라 망....
이게 다 독일 놈들 때문이야....철잉여는 광광 우럭따...ㅠㅜㅠㅜㅠㅜㅠㅜ

강간 문화에 대한 단상




강간문화라는 단어가 가진 특이한 속성은 용어에 대한 부정이 용어의 존립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 이는 마치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도 같은 형식이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생각한다는 술어를 필요로 하며, 그 행위는 생각하는 사람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이 지점에서 강간문화라는 학술용어가 이 특성을 가지게 되는데, 이 용어가 지칭하는 문화에는 강간을 비가시적인 것으로 만들려 하는 움직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강간문화가 거북한 어감을 갖고 있으니 사용하지 말자는 말은 강간문화의 산물로 규정되는 것이다. (이 규정은 단어의 의미 자체에서 오는 것이라 발화자의 의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특히 문화라는 비가시적 미시권력은 원래 내재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지적으로 화자의 발화에 포함되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


 

작년 가을 모 대학교의 페미니즘 학회에서 강간문화를 세미나 제목으로 사용했다가 화제에 오른 적이 있다. (이걸 찾아 읽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어딘지 알 테니 굳이 어디라고까지 언급하지는 않을란다.) 이 때 가장 일반적인 비판의 스텐스가 바로 윗 문단에 등장하는 말이었다. ‘니들 의도는 알겠는데 저렇게 표현하니 거북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뭘 어떡하겠는가? 애석하게도 저 단어는 거북하라고 만든 단어다. 강간문화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은 사회에서 드러나는 경향성을 명백하게 수면 위로 올려놓으려는 데 있다. 애초에 강간이라는 단어를 거북하게 느끼는 것이 문화적 학습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라는 데 저 학술어의 의의가 있다.


 

물론 저 단어를 비판하려면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다. 강간이란 기본적으로 자기결정권 침해라는, 수동성을 바탕으로 한 개념이다. 특정한 말을 조어하는 것은 수면 밑에 있었던 미시 권력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더 강력한 규범적 역할을 제시할 수도 있다. 너는 강간문화의 광범위한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일종의 암시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수동성이 강한 개념이 내재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육체를 백지와 같은 물리적이고 힘없는 대상으로 파악하는 기존의 문제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이는 이리가라이나 그로츠에서 주로 지적되는 문제다. (물론 강간문화라는 학술어 자체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나온 말에 가깝고, 이리가라이나 그로츠는 일선 활동가라기보다는 페미니즘 철학자들이다. 이 두 영역이 얼마나 다른지는 사회학과 철학을 보면 알 수 있잖은가?) 이들에게 몸은 수동적인 대상도, 그렇다고 육체에 대비되는 순수 물질적인 존재도 아니다. 몸은 열려있는 대상이고, 문지방이며, 뫼비우스의 띠이다. 그것은 복잡한 영역을 통해 교직되면서도, 세계를 받아들이는 프레임으로 사전에 작동한다. 이런 측면에서 강간문화는 굉장히 분명하게 수동성을 내재한 개념이고, 육체에 대한 일면적 관념을 부각한다.


 

뭐 이런저런 문제를 떠나, 애초에 이미 만들어진 개념을 성립 근거에 의거해 비판하거나 범위를 제한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용하지 말자는 건 학술적 태도는 아니며, 나아가 학술적 역사에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이는 이미 조어된 언어는 그 자체로 역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구글 스칼라는 rape culture라는 단어에 대해 약 842천 건의 검색 결과를 제시하는데, 이 말은 이 단어를 없애려면 저 모든 결과를 통해 쌓아올려진 단어의 성격을 무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비슷한 예를 희랍어 번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희랍어 εδαιμονία (Eudaimonia)는 번역시 대개 Happiness를 선택하는데, 이 번역이 온당치 못하다는 비판은 이미 수차례 제기된 바가 있다. 그러나 이 번역의 변경은 그 동안 Happiness라는 번역을 통해 εδαιμονία라는 단어가 구축해온 학술적, 역사적 함의를 일축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결국 이 논쟁은 대개 현행 번역을 유지하는 대신 범위를 연구자의 의도에 따라 변형하거나, 혹은 연구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단어를 선택한 뒤 각주를 다는 식으로 처리된다.


 

요컨대 단어의 사용은 그 자체로는 학술적 비판의 여지를 찾기 힘들며, 설령 성립한다고 해도 sns 등지의 프레임 논쟁 이상을 넘어가지 못할 확률이 크다. 이 문제를 공격하고 싶다면 차라리 단어의 성립 근거나 존재 이유를 찾는 게 뿌듯한 양질의 논쟁에 도움이 된다. 학술 조어들은 그 특성상 연구자의 의도를 듬뿍 담기 때문에 왜 그 단어를 썼냐는 비판은 별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칸트한테 자기 철학을 왜 선험 철학이라고 이름 붙였냐고 질문하고 답변에 따라 비판은 할 수 있을지언정 그걸로 선험 철학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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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한 예감은 든다만 피히테 셸링 하다가 열받아서 시선전환 겸. 

아니 독일 애들은 글 쉽게 안 쓰면 죽는 병 걸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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