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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 문화에 대한 단상




강간문화라는 단어가 가진 특이한 속성은 용어에 대한 부정이 용어의 존립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 이는 마치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도 같은 형식이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생각한다는 술어를 필요로 하며, 그 행위는 생각하는 사람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이 지점에서 강간문화라는 학술용어가 이 특성을 가지게 되는데, 이 용어가 지칭하는 문화에는 강간을 비가시적인 것으로 만들려 하는 움직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강간문화가 거북한 어감을 갖고 있으니 사용하지 말자는 말은 강간문화의 산물로 규정되는 것이다. (이 규정은 단어의 의미 자체에서 오는 것이라 발화자의 의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특히 문화라는 비가시적 미시권력은 원래 내재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지적으로 화자의 발화에 포함되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


 

작년 가을 모 대학교의 페미니즘 학회에서 강간문화를 세미나 제목으로 사용했다가 화제에 오른 적이 있다. (이걸 찾아 읽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어딘지 알 테니 굳이 어디라고까지 언급하지는 않을란다.) 이 때 가장 일반적인 비판의 스텐스가 바로 윗 문단에 등장하는 말이었다. ‘니들 의도는 알겠는데 저렇게 표현하니 거북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뭘 어떡하겠는가? 애석하게도 저 단어는 거북하라고 만든 단어다. 강간문화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은 사회에서 드러나는 경향성을 명백하게 수면 위로 올려놓으려는 데 있다. 애초에 강간이라는 단어를 거북하게 느끼는 것이 문화적 학습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라는 데 저 학술어의 의의가 있다.


 

물론 저 단어를 비판하려면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다. 강간이란 기본적으로 자기결정권 침해라는, 수동성을 바탕으로 한 개념이다. 특정한 말을 조어하는 것은 수면 밑에 있었던 미시 권력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더 강력한 규범적 역할을 제시할 수도 있다. 너는 강간문화의 광범위한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일종의 암시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수동성이 강한 개념이 내재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육체를 백지와 같은 물리적이고 힘없는 대상으로 파악하는 기존의 문제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이는 이리가라이나 그로츠에서 주로 지적되는 문제다. (물론 강간문화라는 학술어 자체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나온 말에 가깝고, 이리가라이나 그로츠는 일선 활동가라기보다는 페미니즘 철학자들이다. 이 두 영역이 얼마나 다른지는 사회학과 철학을 보면 알 수 있잖은가?) 이들에게 몸은 수동적인 대상도, 그렇다고 육체에 대비되는 순수 물질적인 존재도 아니다. 몸은 열려있는 대상이고, 문지방이며, 뫼비우스의 띠이다. 그것은 복잡한 영역을 통해 교직되면서도, 세계를 받아들이는 프레임으로 사전에 작동한다. 이런 측면에서 강간문화는 굉장히 분명하게 수동성을 내재한 개념이고, 육체에 대한 일면적 관념을 부각한다.


 

뭐 이런저런 문제를 떠나, 애초에 이미 만들어진 개념을 성립 근거에 의거해 비판하거나 범위를 제한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용하지 말자는 건 학술적 태도는 아니며, 나아가 학술적 역사에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이는 이미 조어된 언어는 그 자체로 역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구글 스칼라는 rape culture라는 단어에 대해 약 842천 건의 검색 결과를 제시하는데, 이 말은 이 단어를 없애려면 저 모든 결과를 통해 쌓아올려진 단어의 성격을 무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비슷한 예를 희랍어 번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희랍어 εδαιμονία (Eudaimonia)는 번역시 대개 Happiness를 선택하는데, 이 번역이 온당치 못하다는 비판은 이미 수차례 제기된 바가 있다. 그러나 이 번역의 변경은 그 동안 Happiness라는 번역을 통해 εδαιμονία라는 단어가 구축해온 학술적, 역사적 함의를 일축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결국 이 논쟁은 대개 현행 번역을 유지하는 대신 범위를 연구자의 의도에 따라 변형하거나, 혹은 연구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단어를 선택한 뒤 각주를 다는 식으로 처리된다.


 

요컨대 단어의 사용은 그 자체로는 학술적 비판의 여지를 찾기 힘들며, 설령 성립한다고 해도 sns 등지의 프레임 논쟁 이상을 넘어가지 못할 확률이 크다. 이 문제를 공격하고 싶다면 차라리 단어의 성립 근거나 존재 이유를 찾는 게 뿌듯한 양질의 논쟁에 도움이 된다. 학술 조어들은 그 특성상 연구자의 의도를 듬뿍 담기 때문에 왜 그 단어를 썼냐는 비판은 별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칸트한테 자기 철학을 왜 선험 철학이라고 이름 붙였냐고 질문하고 답변에 따라 비판은 할 수 있을지언정 그걸로 선험 철학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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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한 예감은 든다만 피히테 셸링 하다가 열받아서 시선전환 겸. 

아니 독일 애들은 글 쉽게 안 쓰면 죽는 병 걸렸나....?




팬덤간의 분쟁은 사라질 수 없다


한 때는 비슷한 장르 팬덤 간 분쟁이 없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만...칸트 전공 교수와 헤겔 전공 교수가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놈을 전공할 수 있느냐"라며 서로 디스하는 걸 본 후로, 난 모든 걸 포기했다. (실화)

현대철학이 나를 열받게 하는 이유

 


오랜만에 들어온 김에 잡담 하나 더. 현대철학을 할 때 가장 빡치는 건 그 사람들의 결과물이 자그마치 이천년도 더 이어진 인문의 역사를 담으려고 시도한다는 데 있음. 이 사람들은 대부분 앞선 이론을 계승하면서도 그걸 넘어서려고 하는데, 이게 사람을 아주 미쳐버리게 만든다.

 

내가 칸트 싫다고 이전 포스팅에서도 징징댔지만 사실 칸트 정도면 양반인 게, 스피노자나 흄 같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는 해도 그게 영향 받은 거지 본인 저서에서 걔들은 언급하거나 인용하면서 까는 사례는 비교적 적음. 가장 유명한 책인 순수이성비판만 봐도 칸트는 자기 선험철학 정립하는 데 바빠서 남의 이론을 정확히 인용주석 달아가면서 해설하고 까는 데에는 관심이 덜함. 애초에 칸트 본인이 독일 관념론의 알파이기도 하고.

 

문제는 이런 선구자들 다음에 오는 사람들임. 예를 들면 이래. A라는 철학자가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기존 이론을 비판하면서 자기 이론을 정립하고 싶어 해. 그러면 당연히 기존 이론을 끌어와야겠지? 그래서 A는 책을 쓰면서 ‘B의 이론은 이래서 잘못됐고 C의 이론은 이래서 쓰레기고, D는 그보다는 좀 낫지만 논점이 틀렸고 E는 아예 언급할 가치도 없고...’하고 입을 털어.

 

문제는 AB, C, D, E를 맞게 해석하는지 알려면 그걸 다시 봐야 함.

 

그럼 B,C,D,E는 가만히 있겠음? 걔들도 또 나름대로 모두까기 짓을 해. 박사쯤 되도 남의 분과는 아예 모를 수도 있는 게 이런 것 때문임. 세월이 지나면서 분과가 비대해질수록 그 안에서도 계열이 나뉘고 나뉘고 또 나뉘고...

 

이 현상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내가 최근에 보다가 던지고 줍기를 반복한 페미니즘 철학자 엘리자베스 그로츠. 이 포스팅을 보는 사람이 인터넷 서핑질 좀 해봤다면 아마 한서희 관련으로 기억하고 있을 텐데 뫼비우스의 띠로서 몸이라는 책의 저자야. 구해서 보려고 시도는 하지 마라. 국내 절판이라 중고본이 십만원대에 거래되는데 책 자체도 더럽게 어려움.

 

여튼, 그로츠는 자기 책에서 라캉과 프로이트와 푸코와...등등 줄줄이 까판을 여는데 그로츠가 이 사람들을 맞게 이해한건지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음. 잘못 이해했다고 뭐 그렇게 뒤집어질 큰일까지는 아닌게 원래 창조는 어느 정도는 잘못된 이해에서 오는 거라. (애초에 그게 뭐든 완전한 이해를 할 수 있는 건 만든 사람 본인뿐임;;) 하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쟤들 이론을 알고 읽는 게 속이 편한 게 그로츠가 쓴 건 해설서가 아닌 자기 이론서이기 때문에 설명도 그다지 친절하지 않아서임. (비슷한 예시 하나 더 들자면 하이데거의 칸트 해설서는 하이데거 이해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칸트 이해에는 별로라는 게 중론. 애초에 하이데거도 칸트만큼이나 글을 늘여 쓰는 족속이라...)

 

이렇게 줄줄이 소세지로 이론이 이어지면 후학들 입장에서는 얘들이 나를 걸어다니는 백과사전 쯤으로 개조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든다고. 당장 독일 관념론만 해도 칸트 본인은 계몽주의나 경험론 합리론 뭐 이 정도 키워드만 알고 구글 검색 끼면 텍스트 독해가 난해해서 그렇지 읽는 거 자체에는 문제가 없음. 근데 칸트를 이해 안하고서 그 뒤 관념론의 흐름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거의 무의미함. 왜냐면 다 칸트 기반으로 이론이 형성되어놔서...

 

이렇게 광광 울어재끼면서 포스팅을 해놓자니 차라리 한 천 년쯤 전에 태어나서 철학하는 게 편했으려나 싶지만 계급제 있고 여혐 오지는 시절이라 망했어요...ㅋ 나야 스탠스가 현대의 여성 인권도 더 나아가야 한다는 쪽이지만 저 시대는 정말 답이 없음. 내 흥미적성과는 무관하게 결혼해서 애 낳고 키우다 죽었겠지 뭐. 심지어 서양은 1700년대에도 무신론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다가는 칼 맞을 위험이 농후한 곳이라...

 

얘기가 딴 곳으로 샜지만, 여튼 요컨데 이렇다. 이천년도 넘는 학문의 역사 다 공부해야 하는 현대 사람들 애도





NBC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후기



시차 때문에 나는 못봤지만 (세상에 누가 아침 열 시를 지저스크라이스트슈퍼스타 라이브로 시작해;;) 41일 부활절 기념 NBCJesus Christ Superstar 후기.

 


한줄 요약 : 누가 존 레전드한테 예수 시켰냐.


 

유튜브에서 가장 내 심정을 대변한 댓글 ; “테드 닐리가 일흔넷 먹고도 너보다 노래 잘함.” (덧붙이자면, 연기도 테드 닐리가 넘사벽이다. 환갑을 넘은 닐리는 심지어 예수보다 하느님처럼 보이는데도!)


사실 아레나의 벤 포스터도 그렇게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나는 너무 곱게 큰 것 같은 예수는 취향이 아니다-존 레전드는 정말 캐스팅 담당자가 누구냐고 멱살을 잡아 보고 싶었다. 내 생이 이렇게 연기를 못하고, 이렇게 노래를 못 하는 예수는 처음이다.

 

나는 미국 팝 뮤직에는 거의 조예가 없다시피, 아니 그냥 없으므로 존 레전드라는 사람이 어떤 업적을 가졌는지는 일말의 지식조차 없다. 단지 그 사람이 한국 내한을 온 적이 있을 정도로 두터운 팬층을 가진 사람이라는 건 알겠더라.

 

문제는 이렇다. 존 레전드는 소울풀한 목소리를 가진 좋은 팝 가수다. 영상을 보고 기가 차서 히트곡 뮤비를 몇 개 봤는데 호소력이 짙고 강렬한 색이 있는 보컬이었다. 하지만 존 레전드가 좋은 팝 보컬이라는 사실이 존 레전드를 좋은 뮤지컬 배우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비교적 무난한 구간의 What’s the buzz 같은 노래에서는 레전드의 보컬적 단점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호산나 때 연기도 뭐 그렇게 거슬리지 않는다. 어쨌든 이 작품은 예수를 슈퍼스타의 관점에서 보고 있고, 존 레전드는 슈퍼스타가 맞으니까. 부러 무대와 객석을 가깝게 만들어놔서 사람들 손 잡아주고 악수해주는 걸 보면 그래, 당대 슈퍼스타 예수도 저랬겠지 싶더라.

 

문제는 JCS의 상징, JCS의 영혼. 모든 예수들의 난제, 겟세마네였다. 이 작품을 아는 사람이라면 두말할 것 없겠고,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이 곡은 뮤지컬 전체를 통틀어 주인공 예수의 가장 강렬한 고뇌와 갈등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곡이다.


기존 종교계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성인으로 예수를 메이킹한 것과 달리, 엔드류 로이드 웨버는 패기 돋게 이 장면에서 예수가 자신의 아버지, 즉 하나님과 격한 갈등을 빚고 있다. 이 뮤지컬에서 예수는 지쳤고, 왜 자신이 죽어야 하는지 궁금하며, 하늘에 삿대질할 패기가 있는 젊은 남자 사람이다. 음악적으로는 하이 G의 고음과 긴 애드리브가, 연기적으로는 거칠고 날카로운, 적어도 끓어오르는 감정이 이 장면을 만드는 중요한 포인트다.


레전드는 노래도 못했고, 연기도 못했다.


내가 앞에서 존 레전드를 좋은 보컬이라고 부른 걸 기억하는가? 겟세마네를 부를 때 나는 존 레전드의 문제가 뭔지 알아냈다. 그는 애초에 그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음역대를 가진 가수였다.


노래할 때 내 목청을 뛰어넘은 고음을 내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 삑사리와 함께 쥐어 짠다. , 톤을 바꿔 가성으로 올려버린다. 삑사리를 낼 수는 없었는지 레전드는 노래 중간, 아주 애매한 부분에서 발성을 가성으로 바꿔 버린다.


하지만 모든 노래에서 사람이 음역대에 맞는 노래를 하는 덴 이유가 있는 법, 이런 방식으로 음을 올려버리면 성량이 대폭 줄뿐더러 일반적으로 음역대에 맞는 노래를 부를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나와 매우 웃기다. 그렇다, 그는 최고로 비장한 이 장면을 최고의 코미디로 만들었다!


레전드가 연기를 못한다는 사실은 설명할 기운도 없다. 팝 뮤지션에게 요구되는 몰입적 연기와 뮤지컬 배우에게 요구되는 극 전체의 연기는 전혀 다른 덕목이다. 레전드의 겟세마네는 비장하긴 한데 그냥 내내 비장하다. 비장하게 지치고 비장하게 화내고 비장하게 삿대질하는데 성대는 비장한 게 아니라 지쳤다. 이 부조화가 일차적으로 웃음을, 이차적으로 애잔함을(...) 준다.


이 비장하고도 강건한 연기는 극 정체에 둘둘둘 감겨 있다. 우리의 존 레전드 예수의 얼굴 표정은 오로지 마리아에게 이해받을 수 있을 때도 강하며 성전 씬 이후에도 강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울부짖을 때도 강하다. 사실 저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삼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지쳐가는 예수, 위호받는 예수, 분노하는 예수, 그러면서도 수긍하는 예수....여튼 인간 예수를 다룬 작품이다. 교주 예수가 아니라! 연출이 예수를 신적 분위기로 받들어 모시면 수긍하겠으나 전통적으로 JCS의 예수는 신보다는 인간적 측면이 많이 부각되므로 역시 대체 연출진 무슨 생각....

 

 

레전드 얘기만 하기는 미안하니까 다른 것들 후기도.

 

확실히 한국 배우가 풀에 비해 인재가 많구나 싶었다. 한국 공연을 봤을 때는 얘들이 공연 말미에 가도 저 지경으로 지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여기는 생중계로 당겨줘서 그런가 뒤로 갈수록 사람들이 지치는 게 눈에 보여서 짠하다. 빌라도의 거창한 삑사리나 뭐 그런건 말하기도 입 아프니 넘어가자(...) 심지어 나는 앨리스 쿠퍼도 누군지 몰라서 저 사람 헤롯 별로라고 한참 궁시렁댔다. 나한테 헤롯은 좀 재기발랄한 면이 있어야 제맛인데 쿠퍼는 비주얼이 너무 헤로인 중독자처럼 뽑혔음. 힘이 없어...

 

하지만 가야바-안나스 조합은 좋았다. 이 궁합은 아레나보다도 더 좋았던 듯. 가야바 바리톤은 무대 뚫는 저음이 압권인데 이 미학을 아는 좋은 배우였다. 안나스도 카랑카랑하게 치는 맛이 있었고. 블러드머니 때 유다를 사이에 두고 후드를 쓴 채 빙글빙글 도는 연출도 정말 좋았음. 카메라로 영상을 남길 때 진가를 발휘하는 연출이랄까...객석에서 보면 저런 연출은 절반쯤 가려서 나오니까 보는 입장에서는 좀 빡침.

 

마리아는 예수랑 붙음으로써 의미를 가지는 캐릭터인데 (다시 시작해요는 내 기준으로 노래가 너무 구리다) 예수가 후졌으므로 이쪽은 인상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예수가 입만 열면, 아니 무대에 존재하기만 해도 고통스러워서 그냥 이 씬이 빨리 끝나길 빌었다고...어차피 I don’t know how to love him도 유다 리프라이즈를 더 좋아해서 대충 넘겼다.

 

그거 빼면 무대는 아름답게 잘 뽑아냈다. 유다 자살씬은 연출이 좀 엉망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철골 엮어서 휑하게 만든 것도 좋았고, 무대 다각적으로 뽑아다 쓴 것도 마음에 들었다. 예수 죽는 장면도 배우가 레전드 아니었으면 좀 더 즐겁게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NBC가 다음엔 더 좋은 배우로 실황을 뽑아줬으면. (이런 건 만들어주는 사람이 최고니까 올리지 말라는 얘기까지는 안 할란다.)




칸트 쓰기 싫다...



저번 게시물에 패기있게 계몽주의 올린 주제에 칸트 싫다니까 이상하지만 개싫다....
블로그 외부 개시하고 처음으로 다루는 개인적인 철학자가 칸트샛기라니 믿을 수 없어....
철잉여는 광광 우럭따...☆
다른 잡덜질 할 거 있나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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